사실 나는 조선일보도 보지 않고, (내가 생각하기에 내겐 정말 쓸모 없는 얘기만 늘어놓은 것 같은) 경제 신문도 보지 않지만, 일종의 마조히즘 때문일까. 내 좁은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보수적인 신문들의 기사를 가끔 포털에서 보고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 때가 있다. 오늘 내 눈에 띈 기사는 바로 "체벌금지 두 달 교실은 여전히 시끌... 자는 학생 깨우자 욕을". 돈은 잘 버는 것 같다만 그닥 생산적인 것 같진 않은 매일경제 기사다. 제목부터 봐라. 얼마나 클릭 잘 하게 지어놨나. 뼛속까지 경제신문스럽다.

왜 경제신문 따위가 감히 교육을 논하는지 모르겠는 건 둘째 치고. 경제신문이라 그런지, 교육에 대한 고민 따위는 하나도 안 한 티를 팍팍 내는 아주 피상적인 기사다. 말하자면, 체벌 금지라는 조치는 조용하던 교실이라는 연못에 돌을 던진 거다. 그 자체로 대단한 진보라는 소리다.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지도하는 건 정말, 아주 어렵다. 이 조치는 일부 관성에 물든 선생님들에겐 충분히 자기반성의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아니, 주고 있을 것이다. 5~10년 후가 걱정스럽다고? 체벌이라는 수단이 없으면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현실을 만든 당신들을 탓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이 기사는 비겁하고 비열한 기사다. 정말 거칠게 묘사하면,

정말 그 때가 좋았는지는 현대적인 개념에서 어떤 점이 좋은 건지 명확하겐 잘 모르겠지만 순종! 이거 얼마나 좋아. 유교적이고 동방예의지국 냄새도 나고. 그러니까 전통적으론 좋았다고 쳐보자. "그 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 아, 체벌이 없어졌네? 그래 체벌금지를 까자. 곽노현을 까자. 덧붙여서 오세훈한테 사람들 반응이 좀 시덥잖은 거 같은데 응원좀 해줄까?

이거 아닌가. 이게 아이들을 위해 할 말인가. 이 사회를 위해 할 말인가. 경제신문씩이나 돼서. 지식경제다, 혁신적인 경영이다, 창조적인 경영이다 이런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신문씩이나 돼서 이런 기사를 쓰나. "그 때는 좋았었잖아. 지금은 뭐가 또 달라졌지"란 말은 가사로 쓰면 참 아름다운 말이지만, 이런 기사를 쓰는 사람의 마인드 치고는 너무 나이브한 거 아닌가. 기사를 쓴 기자가 순진하게 헤헤 거리면서 썼을 거란 상상은 잘 안 되고. 데스크의 지시 아래 어떤 일종의 정치적인 의도에서 쓴 게 아니겠나. 정치적인 의도에서 기사를 쓰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라지만, 그 컨텐츠가 이렇게 폭력적이어서 되겠나.

그래서는 비겁하다, 비열하다라는 말을 안 들을 수가 있겠나.

여기에 덧붙여. '대안 없는 비판을 한다'라는 류의 주장을 하는 사람을 위해 사족을 조금 더 덧붙이련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때리며 지도하는 건 쉽나? 아니다.

체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제는 더이상 초/중/고등학교를 다니지 않는 당신의 경험을, 지금 여기서 솔직히 말해보자. 학교 선생님이 때려서 공부했나? 맞는 거야, 이제 남학생들이 면도를 좀 해야 할 나이 정도가 되면 무섭지 않다. 최소한의 체벌? 그거, 정말 효과 하나도 없다. 그냥 조금 따끔하고 말지. 몸으로 때우고 말지. 이런 패배의식이나 심어주는 게 최소한의 체벌이다. 도전의식을 멋있게 포장하는 나라에서 이런 걸 미덕으로 삼는 건 넌센스 아닌가.

그럼 당신을 공부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나, 잘 생각해보자. 당신에게 정말 무서운 건 미래고,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가지 못 할 것이라는 인식이 아니었나. 중학교 정도 다니는 철 없는 아이들은 내가 지금 공부를 왜 해야 하나 생각을 하지만, 막상 고등학교에 오면 생각을 고쳐먹기 마련이다. 이쯤에서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은 대개 나는 해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체벌이 그렇게 중요한 요소인가? 사람이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무척이나 폭력적이고 위험한 발상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나? 결국 중요한 건 동기부여, 그리고 관심이지 않을까. 시덥잖은 벌점제나 도입하는 것보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이래서 안 좋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진정한 선생님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