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아직도 살아있는 바리캉에게
div style=padding: 10px; background-color: rgb(228, 228, 228)제로피시 기획칼럼(23번째), 올블로그 나의 추천 글입니다./div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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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들어가기에 앞서/spanbr /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의 제목을 보자. ‘아직도 살아있는 바리캉에게’라. 무척이나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타깃은 비교적 단순하다. 바로 머리제한(두발제한). a href=http://www.psnnet.net/wp/?p=2016번 칼럼/a에서도 이미 언급한 적 있지만, 아직도 머리제한의 ‘바리캉’은 살아있다. 절대 다수의 학교 규정집에, 버젓이.br /
지금부터 나는, 저번 칼럼에서와 같이 단순히 ‘분노와 비애’와 같은 단순한 감정만 표출하는 수준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바리캉(사실상 머리제한에 참여하는 선생님들이겠지만)’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머리제한 옹호자들의 몇 가지 논리에 반박하려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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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왜 트라우마를 만드는가?/span1br /
사람들은 자주, 거시적으로 보이는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사고는 결과지상주의를 부른다. 이런 결과지상주의와 ‘폭력’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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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압력과 폭력은 효율적인 통제를 이끌어낸다고들 한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누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그런데, 이게 항상 맞는 게 아니다. 압력과 폭력은 효율적인 통제고 뭐고 하기 전에, 사람에겐 일단 span style=font-weight: bold트라우마/span(정신적 외상(외부에 의해 얻은 상처))로 남는다. 트라우마라는 건, 결코 작은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지도 모르는 게 바로 트라우마다. 그게 어느 수준이냐면...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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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난 아직도 가족중 누군가가 자동차를 타고 어딜 갔다온다고 하면 불안하다. 늦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으면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왜냐고? 이건 나의 어머니와 작은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가 한꺼번에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몇시간째 연락되지 않다, 경찰이 전화를 받았던 그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자동차를 아직도 믿지 못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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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은 100분토론에까지 참여해가며 체벌을 반대한다. 왜일까? 그건 기본적으로 ‘그의 친구가 수업시간에 단지 빗질을 했기 때문에 10분동안 맞았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어서, 아니, 그때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그 무기력감 때문’이다. 그 자그마한 상터가 그렇게 오랫동안 남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그를 100분토론으로 이끌고, 1년 전의 그를 체벌반대 카페를 만들게 이끈 것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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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는데도 과연 그런 압력과 폭력은 정당한 것일까? 그리고 그 효율 운운하기 전에, 신해철이 100분토론 때 입었던 복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네티즌들이 ‘압력과 (언어적)폭력’을 가했지만, 그가 최근 100분토론때는 더 파격적(?)인 의상을 입고 왔던 이유는 또 뭐라고 생각하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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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과연 그렇게 무질서해질까?/spanbr /
머리제한 옹호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머리제한을 없애면 너무 무질서해지고 풀어져 안 된다’는 논리다. 인정한다. 그런 현상, 당연히 나타날 거다.br /
그런데, 그 논리대로 생각해보자. 제한을 없애면 무질서해지고 풀어져서 안 되니,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가의 제한을 없애는 것 역시 해선 안 될 짓인가? 그게 맞는 말이라면 독재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면 대단히 무질서한 상황만 계속될 것이므로 민주화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이었을 거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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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자유를 갑작스레 얻었을 때 무질서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경험이 없으니까.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니까. 전두환 정권이 ‘당근 주기’ 중 하나로 실시한 통금 해제가 그때 당시에는 ‘광란의 밤’이라 할 만큼 무질서를 불러오지 않았나.br /
그런데 말이지, 지금 통행금지 때문에 사람들이 밤만 되면 무질서해져, 견딜 수 없는 상황인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시민 의식도 성숙해져, 잠깐의 무질서 후에는 그럭저럭 질서가 생겨나지 않았던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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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제한도 마찬가지다. 아마 처음에는 억눌려있던 표현 욕구가 한꺼번에 표출되어 “보기 싫은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영영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미 머리제한이 없는게 보편화된 나라들에서 머리제한을 하자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무질서가 지속되고 있던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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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머리길이와 성적이 비례한다고?/spanbr /
황당한 논리다. 머리제한 옹호자들은 “머리 기르는 놈 치고 공부 잘하는 놈 못 봤다”며, 머리가 길면 성적이 좋지 않다는 이상한 논리 말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성급한 일반화와 비약이 있다고 하면 몰라도.br /
“성적이 좋지 않은 (소위 ‘노는’) 아이들이 머리가 단정하지 않다”라는 말은 성립할 수 있는 명제다. 하지만, 한 명제가 성립한다 해도 그 역이 성립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따라서 “머리가 단정하지 않으면 성적이 좋지 않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br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머리가 단정하지 않으면 성적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뭘까. 무식한 걸까, 아니면 상대방을 무식하다고 가정하고, 그런 논리가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걸까? (난 전자에 한 표 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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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진짜 외모지상주의자는.../spanbr /
가끔, 머리제한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머리 모양을 꾸미는 것이 외모지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거를 대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진짜 외모지상주의자는 머리를 꾸미는 학생이 아니다. 그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누구나 자신이 예뻐보였음 하는 심리는 있는 거니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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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진짜 외모지상주의자는 누구냐고? 머리제한을 옹호하는 이유로 가장 많이 대는 것이 바로 ‘학교 이미지 유지’와 ‘대학 면접시 단정해야 유리하다’는 것이다. 더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본다.2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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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span3br /
물론, 머리제한은 이런 논리 말고도 여러 논리로 옹호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의 요점은 모두 같다. 질서, 단정함의 추구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이다.br /
그러니 이 논리는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논리다. 실제로 독재정권을 정당화했던 논리였고, 그 자체로 파시즘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주장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질서는 사회정의보다 상위 개념이 아니다.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br /
한국사회에서는 사회정의라는 말의 정의부터가 모호하다.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사회정의라는 생각마저 있으니까. 하지만, 사회정의는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아니,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되레 사회정의를 해치는 것일 수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사회정의냐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정의는 홍세화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 안에서 사유권이 중요하다면 사회구성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더 중요하다.’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며 공통분모”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다울 생활을 할 권리’를 해치는 법을 지키려 하는 건 ‘준법정신이 빛나는 사회정의’가 아니라 ‘사회정의를 배반하는 행동’일 뿐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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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6/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그래서 저항하련다/spanbr /
그래서 난 저항하련다. 악법도 법이라는 논리로 내 결정을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라. 적어도 난, 악법을 지킴으로써 나의 정의를 버리고 싶어 하고 있진 않으니까.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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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font-weight: bold추신 1/span. “우리도 당했는데 너넨 왜 안 당하냐” 식의 비겁한 논리에는 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그 논리는 언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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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linx0 @ 2006/07/23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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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두발자유를 실시하고 있는 몇몇 학교들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학생들이 어느정도 선을 지킵니다. (실제로 경험하고 있고, 또 다른 학교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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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F. @ 2006/07/23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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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실제로 두발자유를 실시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어느 정도 선을 지키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그것마저 길다고 보는 선생님은 꼭 있더군요...... 후우... 학생에겐 길지 않아 보이고, 적당해 보이는 것마저 길다고 생각하는 거죠.
시선의 차이...도 무시할 순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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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즈 @ 2006/07/24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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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학교도 두발자유입니다. 대부분의 과학고는 아마 두발자유일 겁니다.
저희 학교의 경우, 규정이 있으나 눈만 덮지 않으면 된다는 식이어서 거의 형식적일 뿐이죠.
그런데도 학생회에서 얼마 전에 자발적으로 귀는 덮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고, 선생님들 또한 이에 바탕하여 기준을 적용합니다. 비교적 저희 학교는 자율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p.s. 저도 이 규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귀를 완전히 덮을 정도였습니다. 솔직히 좀 길었죠 -.--

ZF. @ 2006/07/24 00:47-

- 사실 서울도 사실상 두발자유였다가, 한성의 두발제한 분위기에 밀려서..... 그렇게 된 면도 없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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