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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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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백과 ADR, 교훈만 남기네 - 도라지꽃(1987)

2006/11/01 20:05, 글쓴이 mindFULL
div style=padding: 10px; background-color: rgb(228, 228, 228);학교 수행평가용으로 낸 글인데, 한 번 올려봅니다. lt;도라지꽃gt;이라는 영화 감상문인데, 영화 내용 아시는 분은 드물 것 같아서; 북한 영화니까요. a href=http://www.google.co.kr/search?q=%EB%B6%81%ED%95%9C+%EB%8F%84%EB%9D%BC%EC%A7%80%EA%BD%83amp;ie=utf-8amp;oe=utf-8amp;rls=org.mozilla:ko:officialamp;client=firefox구글 검색 결과가 쓸만하니 참고하시면 괜찮을 듯싶습니다./a/divbr /span style=font-weight: bold;br /1./spanbr /br /플래시백. ‘회상’이라고는 번역하기는 약간 힘들고, 과거의 사건을 중간에 삽입하는 기법을 말한다. 많은 영화, 많은 드라마가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과거를 넘나드는데다 단순 회상이 아니라서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br /br /이 영화(아직 북쪽 영화라는 ‘딱지’는 붙이지 않겠다. 그럼 이야기가 재미 없어지니까.), lt;도라지꽃gt;(1987)도 플래시백을 많이 사용한다. 하기야, 이야기를 맨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만 가면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없겠느냐만은 플래시백은 a href=http://www.cine21.com/Magazine/mag_pub_view.php?mm=005003005amp;mag_id=41873lt;씨네21gt; 남동철 편집장(573호)의 말/a처럼 “예쁜 칼”이다. 입체적인 구성의 영화에서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플래시백인 반면, 이젠 플래시백은 워낙 많이 쓰여 식상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플래시백은 “세상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로 단순화”해버릴 위험까지 있다. 몇몇 영화들은 이를 세련된 방식으로 다듬어 잘 이용하고 있지만, 그런 깊은 생각까지 하기엔 이 영화는 너무 일찍(1987년 영화니까) 나온 걸까.br /br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대단히 많이 쓰고 있다. 마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lt;뇌gt;와 같이. 하지만 베르베르의 플래시백 구조가 이중나선처럼 꼬여있다 소설의 끝에 가까워가서야 만나는 흥미로운 구조가 아닌, 첫 번째 플래시백에서 이미 ‘현재’와 만나버리는 재미 없는 플래시백이다. (물론, lt;우리들의 행복한 시간gt;의 플래시백이 눈물을 불러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듯, 이러한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2./spanbr /br /이 영화는 ‘들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 ADR(Automated Dialog Replacement; 후시녹음방식)의 흔적이 역력하다. 80년대의 기술적인 한계일까. 한계든 아니든, ADR은 위험하다. 보다 안정적인 사운드를 얻거나, 아니면 현장감을 극도로 잃거나. 이 둘 중 하나다.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노래들이 안정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건 좋지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현장감이 없다. 생각해보라. (물론 번역 문제도 있지만) 당신은 외국 영화를 볼 때, 자막으로 된 영화를 보겠는가, 아니면 자막이 아닌 더빙된 영화를 보겠는가? 아마 자막을 택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유는, 현장감 때문.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3./spanbr /br /이 영화, 흥미를 버렸을 뿐만 아니라, 현장감마저 버렸다. 왜일까. 왜 이런 짓을 한걸까. 답은 명료하다. 이 영화는 통속영화가 아니라 예술영화다. 사상도 담겼다. 의도적으로 ‘고향에 남아 발전을 도우면 영웅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모두에게 버림받는다’는 교훈을 강조한다. 나머지는 쓸모 없다는 거다. 대사에서나, 여러 장면에서나. 그리고 ‘도망자’의 아들은 용서를 빈다.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구조다. 하지만 이 영화는 조금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말이다.br /br /마지막 장면. 매우 대조적이다. 고향의 발전을 위해 죽어 영웅이 된 한 사람(진송림), 그리고 고향을 버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한 사람(박원봉)과 그의 아들(박세룡). 둘은 (각자 다른 곳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용서를 빈다. 우리에겐 용서하는 것으로 끝맺는 장면이 익숙하나,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일종의 열린 결말, 혹은 용서의 미완결이다. 왜일까. 이쯤에서 북쪽 이야기를 꺼내는 게 적절하겠다.br /br /여기서 잠깐. 진송림이 무엇이 되었는가. “영웅”이다. 1980년대는 북쪽에서 “숨은 영웅”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던 때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가 이용(혹은 악용)한 인간의 (못된) 본성은 이기심이다. 남보다 자기가 잘 되어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원래는 사촌이 땅을 사면 퇴비를 주기 위해 배가 아프다는 소리였지만, 요새는 알다시피 그 뜻이 아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는 그와 배치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당근’을 준다. 그게 바로 영웅 칭호다.br /br /이 ‘예술영화’는 뜯어보면 대단히 교훈적이다. 공산주의에 심하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보면 프로파간다(정치적 선동)로 볼 가능성, 크다. 하지만 공산주의 영화라는 편견을 벗고 보면 ‘프로파간다’라 볼 만큼 심하게 선동적이진 않다. 다만 ‘교훈’을 녹여냈을 뿐. 이러한 영화는 남쪽에도 많이 있지 않나. 왜. 70년대엔 ‘건전가요’라 해서 ‘아름다운 대한민국’ 찬양하는 노래도 강제했는걸.br /br /br /span style=font-weight: bold;덧붙여./span 이 교훈을 잘 녹여내서였을까. 이 영화는 비동맹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는다. 이러한 형식의 교훈적 영화가 북쪽에서 많이 제작되고, 장려되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2006/11/01 20:05 2006/11/0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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