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악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 지도 모른다. 그저 순수한 형태의 분노만 분출해내면 되거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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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선자는 그렇지 않다. 겉으로는 착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보니, 자기 모순을 지니다 보니 그를 파악하는 데 우선 시간이 걸린다. 그 후에는 무한한 배신감뿐. 내가 그를 처음에는 좋아하다, 나중에 뒤늦게 증오하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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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여튼 나는 대토론회 준비 과정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았다. 학생의 의견을 중시하고, 학생을 위하는 척하던 그가 보여준, 그 본모습. 순간 그가 위선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수업도 위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br /
br /
“남의 의견을 잘 들어라”는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었지만 과연 그는 남의 의견을 잘 들었던가. 그래. 발표수업의 형식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이니, 잘 듣기야 하지. 근데 들으면 뭐하나? 다 씹는데. 남의 의견을 잘 들어서 부족한 점을 메꾸는 형식을 취하려 했다면 수업이 인터랙티브 해야할 것 아닌가. 하지만 남의 의견이 언제까지나 (수업 진행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자기가 원하는 ‘정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였다는 걸 깨닫고 난 뒤, 나는 그의 수업에 참여할 마음이 사라졌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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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가상 공간, 그리고 자아정체성. 교과서는 가상 공간이 어쩌구 저쩌구- 하며 자아 정체성 형성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span style=font-weight: bold만/span 말한다. 그걸 인정하라고...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나는, 혹은 많은 블로거들은 너무 특별한 존재가 되고 만다. 나는 나의 자아정체성의 팔할을 블로그를 통해 확립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내 정체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믿는다. 내 정체성의 혼돈의 시기였던 ‘어머니의 죽음’과 정신적 공백기 직후에 시작한 블로그는, 그 많은 정신적 공백을 훌륭히 채워줬다. 그래서, 지금의 나의 팔할은 블로그가 만든 거라 생각하는 거다.br /
br /
하지만 교과서는 말한다. 가상 공간은 상대방을 알 수 없고... 그래서 자아정체성의 중요한 두 축 중 하나인 남이 보는 나의 정체성은 확립할 수 없고... 어쩌구 저쩌구. 난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가상 공간에 글 등을 남기는 건 span style=font-weight: bold사람/span이다. 로봇이 아니라 span style=font-weight: bold사람/span이란 말이다. 이걸 상상하지 못한다는 건 난 상상력 부재라 생각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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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span style=font-weight: bold상대방을 알 수 없다/span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블로그에는 그 사람의 여러 생각, 사고 방식, 생활이 녹아있다. 그만큼이면 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오프라인 모임 등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느끼는 특별한 친밀감, 그리고 다른 관계보다 더 빨리 친해지는. 그런 건 뭐란 말인가.br /
br /
나는 수업시간에 ‘발표’의 형식으로 이런 걸 말하려 했다. 물론 제한된 시간 내에 이 모든 내용을 정리해 발표하기에는 내 능력이 워낙 부족해 그 뜻이 100% 전달되지는 못했을 거다. 미흡한 점도 많았고. 하지만 대강의 내용은 전달이 됐을텐데. 그런데도. 발표 후, 그의 반응. “뭐...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대개 가상 공간은 자아 정체성 형성에 부정적 역할을 끼치죠?” 교과서, 딱 그대로다. 몇년 전의 낡은 내용, 딱 그대로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질 않는 거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42, 142, 142)(물론 교과서 집필 당시의 인터넷에는 블로그, 미니홈피 등의 이른바 ‘1인 미디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시대고, 지금은 나타나고, 대세로 자리잡은 시대다. 그럼 당연히 그 당시 교과서는 낡았으니 지금 상황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수정이 가해져야 하는데, 왜 그대로 수용하냔 말이다!)/spa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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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불가. 그래. 내가 졌다. 하지만, 그건 알아두라. 발표, 토론 형식의 수업에선 “남의 의견을 잘 듣는” 것보단 “남의 의견을 수용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당신도 여러 번 강조한 것일 게다. 하지만. 과연 당신은 수업 과정에서 학생의 의견을 잘 수용해 내 결론을 도출했는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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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수업이라는 형식 자체가 일종의 한계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평소 당신의 태도를 생각하니 당신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난 당신을 위선자라 생각한다.br /
br /
br /
span style=font-weight: bold덧붙여./span 만약 논술이 소문대로 교수 입맛에 맞는 글, 혹은 교수 입맛에 맞는 결론, 혹은 교수 입맞에 맞는 ‘핵심 단어’의 포함 유무만을 골라 학생을 뽑는 과정이라면, 나는 논술이 필요 없다고 본다. 이 세상엔 수많은 스타일의 글이 있다. 날카로운 글, 재미있는 글, 부드러운 글, 딱딱한 글. 쉬운 단어로 쓰여진 글도 있고, 어려운 단어로 쓰여진 글도 있으며, 직관적인 글, 아니면 함축적인 글도 있고, 비유적인 글도 있기 마련이다. 그 다양한 것 중에서 자기 맘에 드는 글만 골라내 대학의 당락을 좌우하려 한다니. 난 그건 논술이 아니라 대학 교수를 위한 단체 마스터베이션 쇼라 생각한다. 표현이 너무 ‘야했나’? 아니. 딱 그만큼인걸.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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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a J. Lee @ 2006/09/26 19:19-

-
그래서 너 지금 나랑 논리로 대결하자는 거냐?
라는 명대사가 있지..-

ZF. @ 2006/09/26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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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
... 푸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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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time @ 2006/09/2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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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냥 1년 내내 수업 대충 씹었는데-_-aaa
그게 제일 현명한 듯ㅋㅋㅋ-

ZF. @ 2006/09/29 21:10-

-
저도 지금 그런 상태에요[...]
(때맞춰 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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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rningMachine @ 2006/10/11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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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선생님이 좋지는 않다만 (사상이 달라서)
이해는 할 수 있어
이유는 간단해 시험을 봐야 하잖아
교과서가 항상 옪진 않아
하지만 교과서에 나와 있는대로 하지 않으면
태클거는사람 나오거든
(역시 scim 글자커밋 문제는 빨리 고쳐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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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블로그와 도덕 교과서
div style=padding: 10px; background-color: rgb(228, 228, 228)a href=http://www.allblog.net올블로그/a 나의 추천 글입니다. 제로피시 기획칼럼입니다. (20번째)br /
/divbr /
span style=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 font-weight: bold0/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비판에 앞서/spanbr /
사실 비판을 받는 도덕 교과서는 좀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교과서라는 것은 5년에 한 번 찍어내는 책이고, 그런 점에서 최신 상황을 적기엔 한계가 크다. 지금 내가 비판하려는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는 무려 2002년 3월 1일에 초판을 찍어냈으니까.br /
그래서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다. 뭐, 익명제를 대체할 수 있는 필명제 등을 예측하는 것은 힘들었으리라. 하지만, 일단 그것 외에도 도덕교과서는 대단히 문제가 많기에, 이렇게 글을 적어본다.br /
br /
span style=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 font-weight: bold1/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도덕 교과서의 성격/spanbr /
도덕 교과서는 긍정을 적는 것보단 부정을 적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그게 도덕 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고, 가장 큰 한계다. 일단,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를 펼치고, 그 짜증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치우고, 차례를 더 넘기고, 본문까지 넘어오니 짜증은 더 커진다. 시작부터가 네거티브다.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란다. 그들이 제시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은 개인주의, 쾌락주의, 과학지상주의다.br /
br /
솔직히 묻고 싶다. 왜 도덕책 처음에 나오는 게 개인주의, 쾌락주의, 과학지상주의 비판이냔 말이다. 과연 지금 한국 사회가 도덕 교과서가 ‘현대 사회’라 말하는 사회와 그렇게 잘 부합하던가?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과학지상주의가 그렇게 퍼져있던가? 그건 아니다. 되레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과학지상주의가 전체주의, 절제주의/이타주의, 그리고 종교지상주의 등에 의해 매도당하고 있는 게 현재 실정이다.br /
br /
또, 까놓고 이야기해서, 전체주의와 절제주의와 비(非)과학, 반(反)과학은 문제가 없나? 그것도 개인주의, 쾌락주의, 과학지상주의 못지않게 문제가 큰 것들 아닌가? (설마, 책 지은 의도가 전체주의 옹호는 아니겠지?) 이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솔직히 정치적인 중립 유지한다는 게 어렵다는 것은 잘 아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도덕’이라는 이름을 버려야지. 도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옳은’ 것을 다루기에, 그 안에 있는 내용은 모두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성이 충분히 있는데. 차라리 윤리학 등의 넓은 개념을 다 포괄하고, 실제로 도덕 교과서가 다루고 있는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주면 안 되나?br /
br /
하나 더. 기실 어떤 이상이건, 현실에 정확히 부합해 들어간 이상은 없었다. 뭐든지 문제점은 하나둘씩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지상주의라 불릴 만큼,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한다면 그건 100% 문제가 생기곤 한다. 마치 ‘절대 권력’이 ‘절대 부패(액튼 경)’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그런 문제점은 논의를 통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든 게 다 문제가 있으니 안 된다는 식으로, 모든 것을 다 부정해선,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려고?br /
br /
뭐, 이상의 내용은 『도덕교육의 파시즘』(김상봉 지음) 63~77쪽에 더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며,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br /
br /
span style=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 font-weight: bold2/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도덕 교과서는 ‘가상 공간’을 어떻게 보는가/spanbr /
그러한 도덕 교과서의 특성상, (그들 표현대로 쓰자면) ‘가상 공간’을 곱게 볼 리가 없다는 건 여러분께서도 잘 알 듯하다. 뭐든지 문제점이 있기 마련인데, 도덕 교과서는 그걸 선택하면 그 ‘문제점 부풀리기’에 급급하니까. 뭐, 가상 공간도 그 문제점이 꽤 부풀려져 있는 건 쉽게 추측하실 수 있을 듯하다.br /
근데, 대단히 놀라운 건, ‘가상 공간 이야기’가 무려 ‘자아실현’쪽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건 착각에 기인한다.br /
br /
먼저, 도덕 교과서는 자아 형성의 요인을 ‘객체로서의 자아’와 ‘주체로서의 자아’로 나누고 있다. 이건 거의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한다만, 문제는 도덕 교과서는 이러한 ‘객체’와 ‘주체’의 요인, 둘 다가 문제가 있다면서 사이버 세계를 ‘매도’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br /
br /
blockquotep가상 공간에서는 익명성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체를 바꾸는 일이 매우 쉽고 현실 세계에서만큼 자기 통제력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무책임하게 행동하게 될 우려가 많다.br /
cite- 『고등학교 도덕』(교육인적자원부), 41쪽/citebr /
br /
또, 가상 공간은 타인의 실질적 존재가 부정되는 공간이므로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해로울 수 있다. 인간의 자아 형성은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 그러나 타인이 존재하기는 하되, 현실적인 존재로 인정되지 않는 가상 공간에서는 객관적인 자기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가상 공간은 인간이 자아 정체성의 형성에 중요한 객체로서의 자아를 파악하는 데 방해함으로써, 여기저기 ‘부유*하는 정체성’을 지니게 할 위험성이 있다.br /
*부유 : 떠돌아다닌다는 뜻으로, 본문의 ‘부유하는 정체성’이란 자아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하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부족하고 자신에 대한 신뢰감이 부족하고 방향감이 혼미한 상태를 의미한다.br /
cite- 『고등학교 도덕』(교육인적자원부), 42쪽/cite/p/blockquotebr /
br /
이건 언뜻 보기엔 맞는 말이다. 익명성이라는 것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난 이 말에 이 책 집필진(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정도서 편찬위원회!)의 가상 공간에 대한 무지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고 본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는 충분히 성립할 수 있는 말이지만, 한 꺼풀 벗기고 나면 틀리는 말이 된다는 거다. 우선, 가상 공간에서, 타인의 존재는 ‘실질적인 존재가 자체가 부정되진’ 않는다.sup1)/sup 우선 자기부터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고, 한국 국민의 상당수가 인터넷을 하는 상황에서, 네티즌들과 일반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차이가 그렇게 큰가?br /
또한, 이러한 가상 공간 사회는 말 그대로 사회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란 말이다. 그리고 정말 친밀감이 높은 가상 공간 사회는 가상 공간에서 벗어나, 실제 공간에서 만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정모’ 등이 될 텐데, 그런 현상은 (집필 시기였던) 2001년에도 충분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타인의 ‘실제적 존재가 부정’되기만 할까? 그건 아니라고 보겠다.br /
br /
span style=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 font-weight: bold3/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대안으로서의 블로그/spanbr /
하지만, 익명성의 문제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무려 ‘자아 실현’과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물론 닉네임은 몰라도 ID는 거의 고정적으로 쓰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 부분에 대해선 반론을 제기할 순 있을지라도 말이다.br /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대안으로 찾아온 것은, 지금 당신 바로 앞에 있는 ‘블로그’다. 일단 익명 기반이면서도 실명제의 장점인 ‘책임감’이 도입된 체제인 ‘필명제’ 기반이다. 댓글을 달아도, 그 닉네임은 가급적이면 자신의 닉네임을 쓴다.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를 링크해 놓는다. 그건 블로그 ‘홍보 효과’와 더불어, 익명제와 실명제의 장점을 적절히 혼합한 형태의 결과를 가져온다. 익명제와 실명제의 장점이 어떻게 혼합되냐고? br /
우선, 블로거들은 기본적으로 블로그 체제 속에선 익명제와 같이 신분을 직접적으로 노출할 필요가 없다. 이건 자기 이름 걸고 글을 쓰는 것보단 부담감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어, 보다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해진다.br /
여기에, 다른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글을 읽고 나서, 댓글 등에 자신의 블로그를 링크해 놓거나(주로 닉네임에 링크를 많이 한다) 트랙백을 걸어, ‘이건 내가 썼고, 난 이런 사람이오. 그러므로 나는 이 댓글에 대해 책임을 지오’라는 형태로 일종의 ‘서명’을 한다.br /
물론, 여기에 도덕 교과서 집필진들은 나에게 여전히 “그렇다고 ‘타인의 실체적 존재’가 바로 보이진 않는 건 그대로가 아니냐”고 반문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블로거들 중 특정 주제(는 IT를 가리킨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각종 컨퍼런스 등에 참가하여 서로 만나기도 한다. 이건 결코 예측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끼리, 언젠간 만나는 건 충분히 현실성 있어 보이지 않나?br /
br /
span style=font-family: georgia,times new roman,times,serif; font-weight: bold4/spanbr /
span style=text-decoration: underline- 그리고 우리/spanbr /
사실, 겨우 4년, 아니 5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이질감을 느끼게 만든 건, 너무 빨랐던 인터넷, 그리고 웹의 발전 속도 때문일 지도 모른다.br /
하지만, 블로고스피어(블로그계)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이른바 ‘급조한 블로그’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러한 블로그들은 자신의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남의 글을 스크랩해와 ‘자신’을 감춰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게다가 ‘a href=http://www.dal.co.kr/chair/semanticweb/sw0107.html웹 엔트로피/a’도 증가시키고 말이다.br /
뭐, 어떤 것이든 문제점은 없든, 이러한 현상도 결국은 이 ‘절대 법칙’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의 해결은 우리가 하는 것에 달렸다는 게 아닐까.br /
br /
span style=font-weight: bold추신./span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많은 비‘판’ 부탁드립니다.br /
br /
――――――br /
1) 어쩌면, 타인의 실질적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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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늑대 @ 2006/06/02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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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또는 예의 범절이라는 단어의 정의 자체가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도덕' 이라는 것이 현재의 상황과는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앞으로는 주어진 자유를 억제하려 들기보다는, 그 자유를 좋은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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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F. @ 2006/06/0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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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는 상당히 많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덕책의 내용은 1980년대의 '국민윤리'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김상봉씨의 견해입니다.
이분은 현재의 도덕 교육을 '노예 도덕'이라 칭하고 계시죠.
실제로, 한국의 도덕 책을 읽어보면, 파시즘이 ‘위장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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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워 @ 2006/06/03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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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탐에 해당하는 '윤리'와 공통과정인 '도덕' 역시 크게 다르지요. 아니 전혀 다른 관계가 없달까...
확실히 도덕은 철학으로 바뀌어야한다고 봅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애초에 도덕교과서는 '해라'라고만 말하지 그 이유에 대해선 잘 설명하지 않지요.
도덕교과서의 사회화(.....)적 기능은 어느정도 필요하다고 보긴합니다만, 그것이 그저 강요라면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국기에 대한 경례'이든, '어른에 대한 예의'든 간에,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 무슨 이유인가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말할수까지 있는 그런 시간으로 바뀌어야한다고 봅니다.
도덕을 빙자한 철학교육이 필요하달까요.-

ZF. @ 2006/06/0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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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교과서는, 어찌 보면, 참으로도 편협한 교과서입니다. 일단 '도덕'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부터요. 자기 나름의 주장을 펼치는데, 사회적 통념이라 어찌 비판하기도 힘든 '도덕'이라는 타이틀로 이를 방어하고 있으니까요.
음.. 도덕은 철학이 '대체'할 수 있는데, 대체하지 마라 하는 것이 전 이해가 안 됩니다. 정말, 누가 이해시켜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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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 2006/06/03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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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얘기를 하시려는 건지 알겠고 공감하는 부분도 있지만 예로드신 것들은 이해가 안되네요.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과학지상주의가 전체주의, 절제주의/이타주의, 그리고 종교지상주의 등에 의해 매도당하고 있는 게 현재 실정이다. 이건 무슨 말이죠? 절제주의/이타주의 등에 의해 매도당한다는 말은 단어 자체부터 조금 낮설군요.
개인주의 물질주의가 점점 팽배해져가는 현실인건 사실이잖아요. 그걸 어느정도 경계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물론 저도 젊습니다) 종교, 세계 작게는 정치, 국가, 민족 얘기 같은 걸 꺼낸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분위기입니다. 그저 재미있고 감각적인 소재들 연예인, 스포츠, 게임, 영화, 패션.. 주로 그런거에 관심이 쏠려있는 경우가 많죠.
좀 뜬금없는 얘기같지만.. 미국라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통일이 된다해도 우리 옆엔 중국과 일본이 있습니다. ZF님 얘기처럼 세뇌의 도구가 되는걸 조심해야겠지만, 우리나라에선 구시대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내용들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위에 크로워님 말씀처럼 왜 그래야하는가를 가르쳐주는게 정석이고 제대로만 심어준다면 효과도 크겠지만 우리나라 교육환경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하기에 아마 힘든 부분이 많을거 같습니다.
태클은 아니고... 위에도 얘기했듯이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고 잘 읽었습니다.
재미난 블로깅 하시고 건강하세요. (__)-

ZF. @ 2006/06/03 21:08-

-
음, 그 문장은 상당히 어색하게 만들어진 문장이라,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건, 개인주의, 쾌락주의, 과학지상주의와 같은 '현대 사회'의 개념들이 전체주의(말이 필요 없죠. 말 그대로 '파시즘'입니다.), '절제주의'(이 말은 '주의'라는 말을 마구 끌어다 쓰는 것을 역으로 비판하려고 만들어 낸 말입니다. 오로지 절제만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죠. 예를 들면, '순결' 교육 같은 것이랄까요), 이타주의(이게 남을 위한 것이면 참 좋은데, 한국에서 나름대로 변질되다 보니, 남을 위하지 않는 것을 매도하는 꼴이 되어 버려서 말이죠), 그리고 종교지상주의(종교를 맹신하는 것인데, 이에 따라 진화론 등은 명백한 학설임에도 불구하고 엄청 절뚝거리면서 나아가고 있죠)에 의해 '이미 충분히' 매도당하고 있는게 지금이라는 소리였습니다.
하나 더 덧붙입니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을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건 결국, 그들의 민족주의가 두려워서 아닐까요? 민족주의를 또다른 민족주의로 '방어'해 내야 할까요, 아니면 민족주의(의 프로파간다) 자체를 반대하여,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지향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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